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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기

엘리...유소년 축구팀 부코치가 되다

by 스마일 엘리 2020.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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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 2월의 어느날... (뭐 이미 창궐했으나 안했다고 믿고 있던 중)

제가 사는 모제스 레이크 시티에서는 어린이 축구팀을 모집합니다. 

와플이가 가끔 뒷마당에서 아빠와 축구를 할 때 너무 즐거워해서 이참에 축구 액티비티를 하나 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에 등록을 하려고 보니 제제도 참가할 수 있는 나이가 되서 둘다 하면 좋을것 같았어요. 안그래도 잉여 에너지가 많은 아이들인데 학교 끝나고 1시간 정도 신나게 뛰어 다니면 몸도 튼튼, 잠도 쿨쿨~ 잘 잘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친한 친구네 아이들도 등록을 했다고 하니 아이들 축구 하는 동안 애들 지켜 보면서 엄마들끼리 편안하게 수다 떨 수 있으니 저에게 더 좋은 일 아니겠어요? 

친구와 수다 떠는 일상이 왜 그렇게나 중요했느냐~ 하면 그간 미국 유아식 책 작업하느라 속세와 연을 끊었거든요. 친구도 안 만나고, 외출도 안 나가고, 외식도 안 하고, 평일, 주말 할것 없이 온 가족과 친구를 내팽겨치고 오직 일만 했어요.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너무너무 많았답니다. 

애들 학교 보내고 조용히 커피 마시면서 드라마 보기! 외식하기! 쇼핑하기! 친구들과 차 마시기! 등등요. 

인터넷으로 축구 등록을 신청하는 동안 혼자서 행복한 상상을 했어요. 애들은 신나게 축구공을 쫓아다니며 축구를 하고, 저는 텀블러에 따뜻한 커피 넣어서 의자에 앉아 친구와 수다 떨면서 한시간의 방해 없는 휴식을 즐기는 제 모습을요. 

그런데 거기에 더더욱 아름다운 모습이 하나 더 떠오르지 않겠어요?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며 함께 뛰어 다니는 와플이 아부지의 모습! 이거슨... 등록 신청서 마지막에 나타난 질문 중 "축구 코치 자원 봉사를 하시겠습니까?" 때문이였죠. 

와플이 아부지는 학창시절 내내 축구를 해 왔기 때문에 어린이 축구 코치 정도는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거든요. 아빠에게 축구를 배운다면 아이들도 훨씬 재미있어 할테고요. 그리고 아빠가 축구 코치 자원 봉사를 하면 아이들 축구 등록 비용은 면제~ 어머! 이건 꼭 해야해. 

그래서 와플이 아부지에게 축구 코치 자원 봉사 할 생각있냐니까 선뜻 한다네요?!?!?!? 

이렇게 저의 아름다운 상상은 현실이 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와플이 아부지는 축구 코치 신청을 했고, 마치 회사 취직하는 것과 다름없는 듯한 이력서를 써 내고, 신원조회까지 다 끝난 후 오리엔테이션을 다녀 왔어요. 그리고는 자기가 맡을 팀의 명단을 받아 왔는데... 

와플이네 5~6세팀과 제제의 3~4세팀, 각각 10명씩 두 팀 총 20명을 동시에 맡게 되었더라고요. 아이들 축구팀 신청을 할 때는 시간대가 겹치지 않았는데 축구 코치 자원 봉사가 모자라서 동시에 가르쳐도 된다며 두 팀을 같이 하게 됐대요. 

"이게 말이 돼? 3~4살 아이들과 5~6세 아이들은 체력도 다르고, 이해도도 다른데 어떻게 같이 해?!?!?! 특히나 3~4살은 축구라기 보다는 그냥 놀이 수준으로 해야 할텐데?" 

라며 흥분하자 와플이 아부지의 청천벽력 같은 말


"그래서 당신이 내 부코치가 되어줘야 할 것 같아!!!! 부코치는 내 권한으로 뽑을 수 있대" 


아아아아아아아아안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내가 왜? 내가 왜 부코치야? 난 못해, 난 운동 못하는 여자야!  난 체육 못하는 여자라고! 난 학창시절에도 수학과 같은 급으로 체육 싫어했다고!!! 난 달리기에서 꼴등보다 한발 앞선게 내 인생 최고 기록이라고! 게다가 나는 발로 축구공을 굴리는 그런 스페셜한 스킬도 없다고!  (무엇보다 이것은 내 계획에 어긋난다고!!!!)" 


라며 아무리 하소연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눈 앞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전 무릎 담요 덮고 커피 마시며 축구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보면서 수다 떠는 장면이  공 줍느라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제 에너지 탈탈 털어먹는 장면으로 전환되었죠.  

게다가 이 액티비티는 2월 말부터 시작해서 4월 초에 끝나는 한달 반 짜리 프로그램에다가 매주 화 목 주 2일짜리 ㅠ.ㅠ 

그 날이 안오기를 바랬고, 그날이 되어서는 비가 오기를 바랬지만 제 뜻대로 되는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첫 축구 수업이 있던 날... 


이.거.슨. 대환장 파티

3~4세 팀 아이들은 이제 갓 3세가 된 아가아가한 아기들도 있다보니 여기저기서 무단 이탈은 물론이고, 그냥 각자 마이웨이~ 

줄 서서 콘 사이로 지그재그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달리다가 그냥 잔디에 벌렁 누워 안 일어나고 버티기, 누가 봐도 쉬마려운데 쉬하러 엄마에게 보냈더니 안 간다고 꼬만춤 자세로 연습장 한가운데 서 있기 (결국 엄마가 와서 데려 갔으나 끝까지 쉬 안한다고 버티며 다시 돌아왔다가 나중에 옷에 쉬함 ) 절대 손으로 공만지기 없기 룰은 개나 줘버리고 아기 피구 하기, 

그 와중에 우리 제제는 수업하는 축구 코치님은 코치님이 아니라 아.빠. 니까 자꾸 팀을 이탈해서 아빠에게 달려가 다리에 매달리기까지 하니 전 그때마다 쫓아가서 떼어내야 했고, 안아 달라며 따라다니는데 달래가며 다른 아이들을 봐 줘야 했습니다. 

이건 축구 부코치가 아니라 1시간 짜리 공짜 아웃도어 베이비 시터였어요. 게다가 2월말이였으니 얼마나 추웠게요. 

거기다가 더더 기가 막힌건 축구 수업 시간이 오후 5시반부터 6시반인데 장소도 가로등 하나도 없는 동네 공원이여서 6시에 해 떨어지니 깜깜 그 자체. 그러니까 갑자기 엄마 아빠들이 차에 헤드라이트를 켜서 아이들이 수업하는 곳에 불을 밝혀 줌요. 모제스 레이크 시티 해도 해도 너무 하네 진짜 !!

수업료는 받아 챙기고, 수업 코치는 100프로 자원봉사자이고, 수업 장소는 불빛 없는 동네 공원에 이건 무슨 헝그리 정신으로 지역 주민 단합해서 애들 축구 시켜 보라는건가? 

그 와중에 각자 준비해 온 의자에 앉아 무릎 담요 덮고 아이들 지켜 보면서 수다 떠는 아줌마들을 보니 부러운 마음과 함께 깊은 한숨만 나옵디다. 

"내 무덤 셀프 삽질 했구나... " 

아마도 첫 수업날 저의 운동량은 지난 1년의 운동량보다 더 많았을거에요. 그 넓은 공원에 마이웨이로 달려 나가는 아이들 잡으러 다니고, 아이들이 던진 공 잡으러 다니고, 우는 아이 엄마 데려다 주고, 이유없이 한쪽에 빠져서 서 있는 아이 어르고 달래서 다시 수업에 참여 시키고... 

집에 오자마자 "나는 오늘 밥 못한다!!!" 며 파업 선언 했어요. 

그러나 남편은 너무 재미있었다고 보람차하며 다음 수업 프로그램을 짜더라고요? 

'그래, 넌 수업만 했잖니... 뒤치닥거리는 내가 다 했으니까...' 

하룻밤 자고 나니 목도 쉬고, 온 몸이 뻐근했습니다. 아~ 목요일이 다가온다 ㅠ.ㅠ 내가 왜 와플이 아부지에게 축구 코치 자원 봉사를 하라고 했을까~ 하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이미 이렇게 된거 어쩌겠어요? 

에휴~ 그래서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습니다. 이왕 해야 되는거 하기 싫다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온 가족이 즐겁게 운동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고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엄마 아빠와 함께 축구 수업한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니까요. 

그렇게 다음 수업 부터는 힘들다는 마음보다 아이들과 같이 운동한다는 마음으로 와플이 아부지를 보조했어요. 그리고 다른 엄마 아빠들도 그 다음 수업에는 공원을 환하게 비쳐줄 전용 조명등을 준비해서 6시가 되니 마치 야간 경기장 같이 환한 곳에서 연습할 수 있었답니다. 

5번의 수업 후 다른 팀과의 첫 경기가 있었습니다. 5~6세팀은 연습이 좀 되었지만 3~4세팀은 사실 축구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연습은 커녕 그냥 축구공 가지고 노는 정도여서 경기가 될까 걱정이였어요. 

오렌지팀 우리팀~ .JPG

5~6세팀은 5:3으로 어렵지 않게 이겼어요. 


블랙팀 우리팀~ 작전 회의중, 그 와중에 제제를 격려하는 형아 와플이.JPG

3~4세팀은 우선 좀 큰 아이들 위주로 선수를 뽑아서 경기에 참여 시키기로 했어요. 작전 회의중인데 듣는이 하나 없고... 뭔 작전회의일까 심히 궁금해서 물어보니 

"얘들아, 우리 골대는 저쪽이야!! 저쪽!!! 우리 골대 저~~~쪽! 오케이? 이쪽 아니고 저~~~쪽! 저게 바로 우리 골대야!! 우.리. 골.대" 

그니까요. 3~4세한테 무슨 작전이 필요하겠어요 ㅎㅎㅎㅎㅎ 그냥 자살골만 안 넣으면 이기는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골 하나 나왔고요. ㅋㅋㅋ 

그래도 우루루 공 쫓아 다니면서 잘 뛰어줬어요. 

그래서 우리 3~4세팀도 승리했답니다. 

승리를 한 우리 꼬마 선수들 지나가라고 엄마 아빠들이 손 마주 잡고 승리의 문도 만들어 주고요. 

그리고 간식도 준비해서 나눠 먹었어요. 

승리를 맛 보고 나니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제 몸속에 흐르는 붉은 악마의 피가 꿈틀~ 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우리 꼬마들이랑 연습해서 다음번에도 승리하리라~ 다짐 했....으나


코로나가 드디어 미국을 덮치면서 외출 금지령이 떨어지고 모든 아웃도어 액티비티가 금지 되는 바람에 축구 수업도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끝이였답니다.  저는 아쉬운 마음 반, 후련한 마음 반이였는데 남편은 아주 많이 아쉬워 했어요. 자기는 정말 재미있었다고 다음번에 기회가 있다면 또 하고 싶.......제가 그냥 입을 틀어 막았어요. 

전 다음번에는 다른 엄마들처럼 의자에 앉아서 무릎 담요 덮고, 우리 아이들 축구 시합 하는거 구경만 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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