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팅 하는 승무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베이스 까지 가는 비행편을 못 타게 되어 이미 배정 받은 스케쥴을 못하게 되는 일이예요. 출근하는데만 비행기로 5시간이 걸리지만 미국 국내선은 어디로 가든, 어느 비행기를 타든 (타항공사 포함) 비행기 티켓이 무료이기 때문에 부담은 없어요. 대신 그 티켓은 철저한 시뇨리티로 입사 순서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스탠바이 티켓이라는게 문제죠. 특히나 저 같이 사번에 잉크 자국도 안 마른 초초 수퍼 주니어는 거의 대부분 스탠바이 리스트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늘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도 항상 스케쥴 보다 하루 일찍 출발하고, 스탠바이 티켓도 예약 해 두고, 스탠바이 티켓을 못 탈 경우를 대비해 비상용으로 점프싯도 함께 예약 해 두어서 일에 지장이 가는 사태는 없었어요. 점프싯은 제가 예약해 두면 제 자리이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반드시 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전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시간, 씨애틀 공항의 게이트 앞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현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전 내일부터 스탠바이 스케쥴이 있어서 하루 전인 오늘 씨애틀에서 애틀란타로 출발 했어야 해요. 제가 아주 아주 신입이다 보니 보통 공항 스탠바이의 첫 시간대인 5시 또는 5시 30분으로 배정이 되었는데, 왠일인지 저녁 8시 스탠바이로 배정이 된 거예요!!! (애틀란타에서 저녁 시간대 스탠바이는 국제선을 탈 가능성이 높은 시간대라, 대기 하는 라운지도 국제선 라운지에서 대기하게 돼요)
보통 오전 스탠바이 스케쥴이 잡힐 경우에는 씨애틀에서 전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애틀란타로 내려 가는데 저녁 시간대로 스탠바이가 잡힌 걸 보니 일찍 가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서 열심히 못다한 집안일을 했어요. 이상하게 시간 펑펑 남아 돌 땐 하기 싫던 일이 일하러 가야 할 시간이 되면 막 에너지가 넘쳐 돌아 더 신나서 하게 되는 건 무엇!?!? 암튼 그동안 늘 맘이 쓰였던 화분들 흙갈이도 해주고...
내일 저녁 8시 스탠바이니까 내일 오전 비행기만 타면 시간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안해서 오늘 밤비행기를 타고 내일 오전 일찍 애틀란타에 도착하는 스탠바이 티켓을 예약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안전빵으로 내일 오전 출발 하는 점프싯도 예약 해 두었죠. 스탠바이 좌석을 못 받으면 점프싯을 타고라도 가야 하니까요.
스탠바이 좌석을 예약할 때만 해도 대기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노쇼 승객이 한 두명 정도만 있으면 충분히 타겠다 안심 하며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밤 출근길은 여유가 있어 가족들 저녁 다 해 먹이고, 설거지 까지 끝내고 나오니 뭔가 뿌듯하고 좋더라고요. 이런 기분은 또 한잔 마셔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들렸죠, 스타벅스!!!
커피나 한잔 할까 하고 들렀는데 못 봤던 신메뉴가 뙇!!! 뭔가 색감도 예쁘고 안에 체리 펄이 들어 있다고 하니 보바티에 들어 있는 타피오카펄인가? 쫀득쫀득한 식감이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 주문 해 봤습니다.
으엌ㅋㅋㅋㅋ 근데 이거 생각했던 맛이 아니네???
쫀득 쫀득 타피오카 식감의 체리펄을 생각했는데 그냥 연어알 터지듯, 입안에서 맥아리 없이 터져 버리더니 살짝 스치기만 하고 가버리는 단 맛!! 뭔가 속은 것 같은 느낌이였지만, 다시 생각 해보니 스타벅스에서 타피오카가 들어간 음료를 팔아 버리면 스타벅스 자존심에 스크래치 날 일이지 싶더라고요. 그냥 카라멜 마끼아또나 마실걸...
후회하며, 스탠바이 리스트에 몇명이나 있으려나~ 하고 스탠바이 리스트 창을 열었다가
흐어어어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 뭐얏!!!!
제가 안 본 새에 엄청난 사람들이 대기자로 있더라고요.
머.선.일.이.고?!?!?!?!
괜찮아!! 노쇼가 많이 있을거야, 이렇게 야심한 밤은 노쇼가 많을 수 밖에 없어!!!
스스로를 다독이며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불길했죠..
대기자 명단이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제 차례가 돌아 올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잘 알기에... 그 다음 비행편인 새벽 비행편 대기자 명단을 찾아 봤습니다.
역시 이른 시간이라 대기자가 별로 없어, 확실히 탈 수 있을 것 같긴한데... 그러나, 스탠바이 리스트는 뚜껑 열어 봐야 아는 것!
이미 노숙 확정임을 알고, 다음 비행편 확인을 했지만, 역시나... 야속하게 게이트 문은 닫히고, 전 결국 애틀란타행 밤비행기를 못 탔습니다. ㅠ.ㅠ
다음 비행기 탑승까지 5시간이 남았는데 집까지 다녀 오면 왕복 2시간, 집에 가서 눈 붙일 수 있는 3시간...
어차피 제 가방 안에는 블랭킷과, 목베개, 안대까지 노숙 준비물은 다 갖추고 있으니 편안하게 누울 곳만 찾으면 되는 것!!!!
지상 직원분께 공항에서 그나마 따뜻한 곳이 있냐고 여쭤보니 밤에는 텅텅 비어서 어딜가도 춥지만 그래도 그나마 누워 잘 수 있는 의자가 있는 곳이 있다며 위치를 알려 주셔서 나의 노숙 준비물들을 꺼내고, 노숙 준비 완료!!! (사실 씨애틀에 델타 승무원들의 크루 라운지가 있고, 그곳에서 편안하고 따뜻하게 잠을 잘 수도 있지만 시큐리티 체크를 다시 받는 것도 귀찮고, 리클라이너 의자를 본 기억이 없어서 그냥 쇼파에서 자는 것 보다 차라리 몸을 누일 수 있는 이 의자에 자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심지어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뷰라 더 좋음....
씨애틀 국제 공항 창문으로 바라보는 희귀 뷰 포인트
포.크.레.인.뷰!!!!!
미국 델타 항공 승무원 됐다고 좋아했는데... 현실은 공항 노숙.
그러나 괜찮아요. 지금은 까마득한 시뇨리티의 초초초 주니어지만 버티기만 하면 시뇨리티로 밥 먹여 주는 때가 온다는 것을 아니까요.
하지만 처음 해 본 공항 노숙은... 두번 다시 못할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블랭킷을 두개나 겹쳐 덮었는데도 어찌나 춥던지.. 그리고 의자가 45도 각도로 눕혀져 있어서 이건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니여!!! 불편 불편 🐕불편...
그렇게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5시가 되서 첫비행기를 타러 게이트로 갔더니 왠열!!! 제가 스탠바이 리스트 1번이더라고요.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탄다!!!
그리고 배정 받은 좌석은... 퍼스트 클래스는 아니지만 델타 컴포트!!!!
노숙은 했지만... 어쨌든 늦지 않고 무사히 애틀란타에 잘 도착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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