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마트에는 배거라는 포지션이 있어요.
계산대에서 제가 물건을 스캔한 후, 물건을 계산대 끝으로 보내면 그 끝에서 물건들을 종류별로 비닐 봉투에 담아서 손님의 카트에 옮겨 주는 일을 사람들이 배거예요.
바쁘지 않을때는 캐쉬어인 저희들이 직접 봉투에 담아 드리지만 피크 시간에는 보통 배거들이 한 계산대에 한명씩 전담해서 봉투에 담는 일을 한답니다.
그런데 제가 일을 시작하고 가만히 보니, 이 배거들이 자기 맘에 맞는, 또는 얘기가 잘 통하는 친한 캐쉬어들과 일하는 경향이 있더라구요.
보통 배깅을 하면서 캐쉬어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손님과 캐쉬어와 함께 3자 회담을 열기도 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친한 캐쉬어 계산대에 서서 일을 할려고 하는거죠. 그러다 보니, 저 처럼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캐쉬어의 계산대와 친한 사람의 계산대가 비어 있으면 친한 사람 계산대에 가서 배깅을 도와 주기 때문에 바쁜 시간대에는 혼자서 스캔하랴, 물건 봉투에 담으랴 정신없이 일해야 해요. ㅠ.ㅠ
게다가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유일한 아시아인인 제가 낯설어서인지 다들 아래 위로 스캔만 주구장창 하고 먼저 말걸어주거나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서 한가한 시간에는 좀 외롭게 계산대를 지키곤 했죠. 눈물 또르륵~
그런데 어느날 제 계산대에 배거 한명이 와서 열심히 배깅을 하며 도와 주길래, 한가한 시간에 제가 먼저 인사를 하자, 저에게 일한지 오래 됐냐며, 자기는 오늘부터 일하게 되어서 그날이 첫날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랬구나.... 너도 갈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왔구나....'
어쨌든 그날을 계기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서 전 드디어 그 녀석을 제 배거로 만들었습니다. 움하하하하하~
그 녀석과 제가 함께 스케쥴이 들어 있는 날이면 항상 그 녀석은 제 계산대에서 배깅을 도와 주게 되었거든요. ^^;;; 저번주 포스팅 처럼 제 나이를 알기 전, 자기와 또래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제 나이를 알고, 수다를 떨면서 제가 결혼했다는 것, 아이가 있다는 것, 임신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자 이 녀석은 자신의 진로를 진지하게 상담하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친해지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그 녀석과 마음 맞춰서 일하다가 좀 한가해 져서 계산대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어떤 이방 같이 생긴 녀석이 저의 배거를 데리고 쪼오기 구석으로 가더라구요.
그리고 저를 힐끔 거리면서 뭔가 얘기를 하는데 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내 배거를 꼬드기지 말거라~ 걔는 이미 내 사람이란 말이닷!!!!'
그런데 한참을 얘기하고 돌아온 제 배거는
우리 얘기하는거 들렸어요?
지들끼리 속닥거려 놓고, 내가 울트라 소머즈도 아니고 어떻게 듣냐고!!! 안 들렸다고 하니
쟤가 누나한테 관심 있대요. (번역상 누나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냥 you라고 한거 아시죵? 이런 사소한 번역 태클은 참아주세용)
와아아아아아앗?!?!?!?!?!?!?
전, 그 이방 녀석을 그 날 처음 보았단 말입니다. 본 적도 없고, 서로 말 한번 섞어 본 적 없는, 그야 말로 갑툭튀 이방같은 녀석이었는데 어디서 저를 보고, 저의 무엇을 보고 관심을 가진 것인지....
아, 뭐야 뭐야, 궁금해 궁금해, 늬들 무슨 얘기 한거야, 빨리 고해보거라!!!
저의 배거말에 의하면 그 녀석이 다짜고짜 오더니 제 배거에게
너, 쟤한테 관심있어? 쟤가 일하는 날은 왜 쟤랑만 얘기하고, 쟤 옆에서 배깅만 해? 너 다른 여자들이랑은 얘기도 안하면서, 쟤가 일하는 날은 쟤랑 계속 얘기더라
뜬금없는 질문에 황당했던 제 배거는 반대로 그 이방 녀석에게 저한테 관심있냐고 물어 봤답니다.
그랬더니
응, 관심있어, 조만간 쟤한테 말 걸 생각이였어. 그런데 갑자기 니가 쟤 앞에 나타나서 쟤랑만 일하고, 쟤랑만 얘기하니까 너도 쟤 좋아하는지 확실히 하고 싶었어.
라고 했다지 뭐예요.
ㅍ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얘들아, 누나 좀 웃자꾸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방 녀석, 너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 무료한 삶에 이런 큰 재미를 주는거니??!?!?!?!
이 얘기를 듣고는 봇물 터지듯 궁금 터져서 막 질문을 쏟아 부었죠.
걔한테 나 몇살이라고 얘기했어? 나 결혼했다고 얘기했어? 애가 있다는 것도 얘기했어? 임신했다고도 얘기하지 그랬어?
누나 나이 얘기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안 믿던데요? 그래서 결혼도 했고, 애도 있다고 얘기 했어요. 그 말 듣고 충격 받아서 갔어요.
그래서, 그래서 걔는 몇살인데???
19살요!
와아아아아아앗?!?!?!?!?!?!?
이 놀라움의 의미는 '그의 액면가로는 절대로 19살일 수 없다' 라는 것과, 19살이면, 제가 19살에 19금 일상 시트콤을 한편 찍었더라면 벌써 그만한 아들 녀석이 있을 나이차' 라는 것!
정말 세상에 이런일이 다 있나 싶었죠.
이것은 아마도 제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네요 ㅋㅋㅋㅋ
아무튼 충격을 받아 나갔다던 그 이방 녀석이 마음을 좀 진정 시켰는지 돌아왔더라구요.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저에게 건넨 최초의 말은...
헤이, 엘리, 너 정말 ** 살이야???
이눔아, 나 오늘 너 처음 봤다. 누나한테 how are you doing정도는 하고 물어야 되지 않겠니? 라고 하기엔 어린 가슴에 상처가 클 것 같아 (?) ㅋㅋㅋ 그냥 간단 명료하게 그렇다고 했죠.
그러자 무슨 경찰 취조도 아니고, 예스 오알 노 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을 촤르륵 늘어 놓기 시작합니다.
결혼한 것도 맞고?
예스
예스가 끝나자 마자 이 녀석 입에서 나온 말은
댐잇!!!
너, 진짜 나 초큼 좋아했구나 ㅠ.ㅠ
애가 있는것도 맞고?
예스, 그리고 뱃속에도 베이비가 하나 더 있어 ^^;;;; 내가 몇 살인줄 알았어?
난 너 21살 정도일 거라 생각했어.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구....
사실, 이 이방 녀석이 전 포스팅에 언급했던 D군이랍니다.
D군은 배거가 주 포지션이 아니라 밖에서 카트 정리를 하는게 주 포지션이라서 마트 안에서 일하고 있는 제가 볼 일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전 D군의 존재를 몰랐는데, D군은 일하는 직원중에 유일한 동양인이였던 (지금은 유일하지 않지만...) 제가 눈에 띄어서 관심있게 보고 있었던 거였죠.
그러다 저에게 말 걸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늘 홀로 일하던 제가 남자 배거와 친하게 지내고, 그 남자 배거와 수다를 떨고, 그 남자 배거 역시 다른 여자 배거들과는 대화를 하지 않는데 저랑만 애기하고, 저랑만 일을 하니 저희에게 이상 기류가 흐른다고 오해를 하고, 둘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제 배거와 대화를 나눴던 거였어요.
그런데 그 대화의 끝은...
그녀는 이미 비공식 폭탄 제거 요원 (울 남편) 에 의해 깔끔하게, 해체, 제거 되었다
였던거죠.
제가 만약 그 녀석의 바램대로 21살의 싱글 여성이였다면 이 에피소드가 두근 두근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되는 로맨스 이야기로 가득찼겠지만 아쉽게도 이렇게 기-승- 결로 끝나는 허무한 스토리가 되었습니다.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크로거에서의 엘리의 역사적인 에피소드.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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