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4개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케케묵은 에피소드 하나 꺼내 보겠습니다.
취미가 없다고 징징대던 남편이 차고에 박혀서 나무를 갈고 뭔가를 만들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고 제가 살짝 말씀 드렸죠? 그 얘기예요.
때는 2월초의 어느 날...
저희집에 전 주인인이 남기고간 다 썩어 빠진, 장작으로나 패면 딱 좋을 나무 판떼기와 각목들이 몇개 있었습니다.
이걸 그냥 버릴까 하다가 남편이 뭔가 쓸데가 있을거 같다고 해서 그렇게 차고에 방치된게 2년 가까이~
물론 그 사이에 그 나무들로 화분 스탠드?를 하나 만들긴 했죠.
사실 아주 잘 만들었다고는 할 수는 없었으나 뚝딱 뚝딱 하더니 뭘 만들어 내는것을 보니 굼벵이의 재발견이랄까? 구르기만 할 줄 아는줄 알았더니 덤블링도 하네?
뭐 그런 느낌이였죠. 당연히 칭찬 드~음뿍 해 줬습니다.
그 화분 스탠드 이후 1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나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게임을 하다 말고 너무 지루하다며 뛰쳐 나가더니 차고에 앉아서 뭔가를 지잉지잉~
한시간 넘게 지잉~지잉~ 하더니 하얀 나무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 쓰고 나타나 샤워 한다고 안방 욕실로 들어가면서 그 하얀 나무 먼지를 온 집안에 흩뿌려 놓았습니다.
뭘 만들었나 싶어 남편이 샤워 하는 동안 차고에 갔다가 저 기절 할 뻔!!!!
세상에 나무 먼지가 검정차를 하얗게 덮은것도 모잘라 차고에 있던 신발이며 바닥이며 눈 쌓인것처럼 쌓여있더라구요.
아우 진짜!! 이걸 어떻게 다 치울려고!!!!
이 느낌 아실려나요? 아들이 뭔가 기특한 일을 해서 응원해 주고 싶은데 그 뒷 마무리가 감당이 안되는? 쉽게 설명하자면 남편이 요리 해 준다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데 막상 주방은 온갖 조리 도구들 다 나와 있고 설거지거리는 싱크대에 쌓여 있고 가스렌지 주변은 음식 흘린것 불에 눌어 붙은것 범벅이 되어 있는 딱 그런 느낌.
이걸 보고 잔소리를 해서 남편이 새롭게 시작한 취미 활동의 사기를 꺽을 것인가? 비디오 게임을 안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으로 여기며 이 먼지구더기가 되어 가는 차고를 받아 들일것인가!
전 후자를 택했습니다.
공부 안하는 아들 공부 한다고 책 폈을 때 심부름 시켜서 앞으로 다시는 책 펼 기회가 없지 않을까 불안한 그런 엄마 맘이였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뭘 만들고 싶었길래 게임을 박차고 나간건가 싶어 살짝 들여다 보니...
문 손잡이 같아 보였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에게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평생 공부 안하던 아들 처음으로 1시간 공부했는데 뭐 공부 했냐 물어보면 부담 스러워 앞으로 두번다시 공부 안한다 할까봐서요.
(엄마... 그래서 나 공부 안한거예요.... ㅋㅋㅋ )
그리고 다음날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차고에 가더니 지잉~지잉~ 지잉~ 소리를 내며 한시간 넘게 작업을 하고 들어왔습니다. 남편이 샤워 하러 간 동안 몰래 또 차고에 가봤습니다. 하얀 눈세상이더라구요.
나무 손잡이와 뭔가 더 추가 되긴 했는데 도통 뭔지 감 잡을 수 없는?
그럼에도 놀라운건 이것들이 네모난 각목 상태의 나무들을 한시간 넘게 계속 갈아서 이런 모양을 만들어 냈다는거죠. 그러니 엄청난 양의 나무 먼지가 쌓였던거구요.
그리고 주말이 되어 전 쭈꾸미 언니네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왔어요.
몇시간 만에 집에 돌아와 차고를 지나면서 흘낏 보니
오호~ 뭔가 제법 형상을 갖추었더라구요. .
이때 느낌이 딱! 왔습니다.
남편이 만들고 있는건 꽃이라는걸요.
그리고 2월이니까 왠지 느낌에 발렌타인데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는것 같은 느낌?
4년전 발렌타인데이 앞두고 초콜렛을 만들던 남편이 서프라이즈 해 주는줄 알고 설레발 치던 옛생각이 나는구만요. ㅋ
2013/07/23 - [일상 생활기] - 미국인 남편이 만드는 수제 초콜렛
아무튼 저 여기서 무한 감동 받아야 하는거 맞죠?
근데 안타깝게도 감동이 안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왜 하필? 나무로 갈아 만든 꽃이야? 그냥 생화를 사다 줄 것이지 아놔~
사실 제가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실은 제가 연애할 때 남편에게 꽃은 비싸고 시들어 버리니까 꽃 선물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나이 먹으니까 왜 갑자기 꽃 선물이 받고 싶냐고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도 이제는 꽃 선물을 받아 보고 싶다 몇번 말 한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니 나름 시들지 않는 꽃을 선물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이건 뭐 노력과 정성에 비해 너무 허접한 결과물이 될게 뻔한데 이걸 제가 감동할거라고 상상하며 몇시간씩 나무 먼지를 마시며 작업하고 있으니...
진실과 진심을 알려 줄 수도 없고 또 서프라이즈인데 아는척도 할 수 없고 참으로 안타까웠죠.
그러던중 자기가 보낸 문자에 답을 안했다는 이유로 삐져서 부부싸움을 하게 됐습니다.
유치하지만 우리 부부는 싸우면 2~3일 서로 말 안하거든요.
3일 지나면 그냥 화해랄것도 없이 다시 말하기 시작, 왜 싸웠는지는 이미 기억 저편으로~
근데 서로 묵언 수행중에도 남편은 차고에 들어가 지잉~지잉~ 꽃잎을 갈아대고 있더라는...
그러나 꽃이 완성되기도 전에 발렌타인데이가 되어 버렸지요.
미완성인 꽃을 줄 수는 없었던지 카드와 초콜렛만 주더라구요.
나는 니가 지난 며칠동안 한 일을 알고 있다. JPG
그러나 끝까지 모른척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이 됐나부죠? ㅋ
"실은 발렌타인데이때 줄려고 이걸 만들었는데 그때 완성을 못해서 못 줬어. 허접한거 나도 알아. 그래도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우리가 싸워서 말 안할때도 이거 만들었어"
눈물나서 울뻔...........................
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냥 자꾸 피식 피식 웃음만 날 뿐이고~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는데 정말 솔직히 이걸 받고 기쁘지는 않고, 허접한거 본인도 안다며 선수치고 들어오니 뭐라 할말도 없고...기쁘게 해 주고 싶었으면 차라리 그냥 생화 장미 한송이를 사 왔더라면 더 기쁘고 감동이였을텐데... ㅋㅋㅋ
그치만 각목을 갈아 이 정도의 형상을 갖춘 꽃을 만들어 낸 그 정성은 인정!!!!
보이는가? 꽃봉오리에 새겨진 깨알같은 하트가!!! . JPG
그러나 저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최대한 연기에 몰입해서 제 파트의 대사를 쳐냈죠.
" 아니야, 전~혀 허접하지 않아!! 세상에!! 어떻게 나무로 이렇게 꽃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 너무 고마워~ 나 생각하면서 이걸 만들었다는게 너무 감동적이야!! "
라고 말하다가 눈가에 눈물이 맺혀버린;;;;;
그 정성이 정말 고마워서 울컥한 것인지, 연기에 100% 몰입한 결과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중요한건 끝끝내 "너무 예쁘다, 진짜 잘 만들었다" 라는 대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
'일상 생활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차 적응 중~ (3) | 2018.06.04 |
---|---|
육아의 야간 잡무를 아십니까? (9) | 2018.04.30 |
범인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녀석이다 (9) | 2016.09.29 |
새해 복들 많이 받으셨습니까? (11) | 2015.01.13 |
직구의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이유 (7) | 2014.11.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