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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기

놀이터에서 만난 미국인 소녀의 속내

by 스마일 엘리 2017.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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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와플이와 제제를 데리고 단지내에 있는 놀이터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놀이터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어 전세 낸 듯, 와플이 혼자 놀고 있는데 잠시 후, 열 세 네살쯤으로 보이는 미국인 십대 소녀들 4명이 놀이터로 들어 오자, 연상도 가리지 않는 와플이는 냅다 그 무리속으로 뛰어 들어가 청일점이 되어 그 십대 소녀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타며 놀더군요.

 

 

 

그런데 그 십대 소녀들 중에서도 유독 한 소녀가 와플이를 마치 누나처럼 따라다니며 놀아주는겁니다.

미끄럼을 타고 내려 오는 와플이를 받아 주는가 하면, 구름다리에 매달리도록 잡아 주기도 하고, 넘어진 와플이를 제가 뛰어가기도 전에 일으켜 세워 주기도 하구요. 다른 소녀들은 자기네들끼리 놀이기구를 타고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 소녀만 유독 와플이를 졸졸 따라다니더라구요.

 

 

저도 계속 와플이 주변을 따라 다니며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 소녀가 드디어 저에게 다가 오더니 아주 친근하게 말을 걸더군요.

 

"여기 얼마나 오래 살았어요? "

 

"1년 반 정도 됐어요. 일본에서 살다가 왔거든요"

 

"오, 그렇군요, 이 동네 어때요? 맘에 들어요? "

 

"그럼요, 정말 맘에 들어요. 조용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사실 동양인이 많이 없어서 걱정을 좀 했는데, 아직까지 나쁜 경험도 없었고, 좋아요"

 

" 맞아요, 이 동네 꽤 좋은 곳이예요, 전 이곳에 10년째 살고 있는데, 학군도 좋고 깨끗하고, 아주 좋은 동네예요. 알다시피 뷰포트쪽은 학군이 별로잖아요"

 

뭐지? 이건? 명랑 발랄한 미국인 10대 소녀가 아줌마스런 학군 얘기를 하고 있는 이 시츄에이션은?

뭔가 좀 웃기긴 했지만 어쨌든 대화가 이어지고 있으니 그냥 쭈욱~ 계속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일본에서 왔으면 일본어도 말할 수 있어요? "

 

" 네, 일본어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실은 난 한국인이예요"

 

그랬더니 갑자기 이 소녀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면서

 

"오 마이갓!! 한국인이예요? 나 K팝 너무 좋아해요!!! BTS 알아요? "

 

아주 자연스레 아줌마스런 수다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10대스런 화제 전환...

 

"으응? BTS가 누구예요?? "

 

"BTS를 몰라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이밴드예요"

 

속으로 아줌마스런 대화를 하던 그녀가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젠장, 막상 10대스런 화제로 바뀌니 갑자기 대화 중도 단절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BTS를 검색했더니 '방탄소년단' 이라고 나오더라구요.

 

뭐지? 총알받이 북한 소년 합창단이 연상되는 이 그룹은?

아~ 저도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시대에 뒤쳐지는 아줌마가 된건가요?

이실직고 하건데, HOT가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남자 아이돌 그룹이라, 방탄 소년단은 이날 이 미국인 소녀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것이죠.

지구 반대편에 사는 미국인 십대 소녀가 아는 한국 가수를, 한국인인 내가 모른다니!!!!!

완전 충격이었죠. 그래서 그냥 제 스스로 자폭 발언을 해 버렸습니다.

 

You know, I'm an old lady

 

시대에 뒤쳐지지 않고, 젊게 산다고 나름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내 입으로 내가 올드 레이디라고 인정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랬더니 이 소녀는 저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듯,

 

"그럼 엑소는 알아요?"

 

에...엑 소? 다... 다행이다. 들어 본 적이 있다.

 

" 아~ 엑소 알죠. 사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들어본 적은 있어요" 

 

라고 대답 했지만 사실 아는게 하나도 없어서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함을 예감하고, 대화 주도권을 빨리 뺏어 이 위기를 극복해야 겠다는 판단이 들어 제가 잽싸게 질문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 어떻게 K팝을 알게 됐어요? 나도 외국에 살다 보니 K팝 들을 기회가 없어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구해서 듣는거예요? "

 

"친구가 K팝을 좋아해서 그 친구가 꼭 들어보라고 해서 들어보고 빠지게 됐어요, 유투브에서 듣고 있어요, 기회가 되면 꼭 한국에 가 보고 싶어요. 한국인이니까 한국어도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럼 3개국어를 할 수 있는거예요? 와~ 멋지네요! 사실 나도 3개국어를 해요. 영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해요, 우리 엄마는 5개국어를 해요"

 

대화 주도권을 잡고, 질문을 퍼 부었으나, 대화의 끝은 본인과 본인 엄마의 깨알 자랑. 3개국어 하는 날 보고 멋지다며 칭찬하더니 자신도 3개국어를 하고 (고로 자기도 멋지다는 말? ㅋㅋㅋ)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는 5개국어를 하니, 그럼 5배는 더 멋지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ㅋ

대화가 계속 될 수록 뭔가 자꾸 제가 말려들어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그녀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 참,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은 이사벨라예요. 혹시 베이비 시터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알다시피 여기 베이비 시터 비용이 시간당 13불~ 15불 이렇잖아요? 전 8불에서 10불 정도면 돼요. 뭐, 7불까지도 괜찮아요. 장시간이 아니더라도, 한 두시간도 괜찮고, 20분, 30분도 괜찮으니까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요 맹랑한 아가씨, 알고보니 지금까지 저한테 영업하고 있었던거였더라고요.

것도 아주 치밀하게!!!!

집에서 오는 전화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현장 (놀이터)으로 나와, 고객 (어린이)과 잘 놀아주는 모습을 부모에게 보여 준 후, 실고용주 (부모)에게 다가와 가벼운 대화를 시작으로 친밀감을 형성하고, 공통점을 찾아내어 신뢰감을 심어준 후, 본격적으로 베이비 시터 영업을 하는 거였죠.

 

대.다.나.다

 

게다가 자신은 저렴한 가격과 단시간 이용도 가능하다는 유연성을 강조하기까지!!!!!

이게 절대로 한두번 해 본 영업 실력이 아니예요.

귀신에게 홀린 듯, 베이비 시터 영업에 말려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래요, 필요할 때 연락 할게요, 전화 번호가?"

 

라고 묻는 저에게 '확실하게 알려주마' 라는 듯 제 전화기에 직접 자기가 입력 해도 되냐고 묻고는 제 전화기를 들고 가더니 연락처에 전화번호와 이름, 심지어 '베이비 시팅'이라고 입력해 놓는 치밀함.

 

 

게다가 마지막으로 한번더 강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결정적 멘트를 날리는 그녀

" 난 CPR 자격증도 있어요~"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구름다리 건너는 와플이 다리를 잡아주고, 미끄럼틀 한번 태워주더니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마지막까지 프로페셔널한 베이비 시터로서의 눈도장을 찍겠다는 그녀의 영업 전략이 눈에 보이더라구요. ㅋㅋㅋㅋ

 

 

그녀가 사라진 후 '뭔가에 홀린듯한 이 느낌은 뭐지?' 했지만 역시, 그녀의 전략은 성공적이였습니다.

맹랑한 이 어린 아가씨가 맘에 들었거든요.

사실 13살이면 어린 나이인데,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이렇게 용기있고 당당하게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자신감이 훌륭하지 않습니까?

저 13살(한국 나이로 15살)때, 학원 끝나면 친구들이랑 떡볶이나 사먹으러 다니던 나이였는데 말이죠.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정말로 베이비 시터가 필요할 때, 그녀에게 연락을 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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